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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

제 672 호 [독자마당] 봉사와 아프리카, 그 편견과 선입견에 대하여.

  • 작성일 2019-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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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람

봉사와 아프리카, 그 편견과 선입견에 대하여.


김보름(문화예술경영·3)


이 글은 한국국제협력단 사업으로 진행된 2018년도 2학기 “영상으로 보는 국제개발협력 이슈” 교과목 수강생 중에서 해외봉사단원으로 선발되어, 2019.01.19.~2019.01.27.(6박9일) 기간 동안 탄자니아 탕가(Tanga)지역 및 차니카(Chanika)에서 현장활동을 수행하고 돌아온 후의 소감이다


봉사란 무엇인가?


봉사(奉仕)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씀’ 으로 정의되어 있다. 이 사전적 정의에서 보여지는 핵심은 결국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남을 위해 애쓰는 것’일 것이다. 사전적 의미에서도 보여지는 것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희생과 봉사를 동일시해왔다. 나 역시 단순하게 봉사정신이란 곧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희생정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러던 중, 탄자니아에서 하루의 봉사일정이 다 끝난 뒤 함께하는 저녁 식사 시간이 있었다. 그 식사자리에서 교수님은 이번 현장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만의 봉사에 대한 정의를 만들어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더불어, ‘봉사가 꼭 힘들고 괴로운 것일 필요는 없다. 내가 즐거운 것이 봉사다’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봉사는 나의 행복과 즐거움을 추구하면 안 돼. 무조건 나의 편안함과 행복은 후순위야.’ 라고 생각해왔던 나의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봉사활동에 와서 나의 개인적인 편의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은 마치 죄악인 것 마냥 여겨지던 생각들에 균열이 생겼다. 돌이켜 보니 이유없는 죄책감은 정말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불필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봉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봉사란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는 단순한 명제에 맞춘 편견이었다. ‘봉사란 희생이다. 그러므로 희생이 아닌 것은 곧 봉사가 아니다’는 명제로 치환된 단순 정의일 뿐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봉사란 무엇일지 그 본질에 대해 고민해보았다. 그전까지 봉사의 필연적 요소는 자기희생이라 생각했는데 사실은 필연적인게 아니었다. 봉사자인 내가 행복해야 주위사람들도 행복한 에너지와 기운을 전달받는 것이었고, 내가 즐거울 때 비로소 봉사라는 행위의 지속가능성이 높아졌다. 결국 희생이란 어쩌면 불필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봉사란 함께 잘 살기 위한 일이 아닌가.


더불어 봉사자를 곧 희생자로 치환해왔던 내 생각이 굉장히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자들이란, 반드시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여나 다른 봉사자들을 볼 때, 그들에게 희생을 당연스레 요구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머물렀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봉사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봉사의 정의란, ‘함께 행복하기 위해 기꺼이 행하고 참여하는 행위’이다. 결국 봉사의 본질은 함께 행복하고 함께 잘 살기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봉사정신이란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하여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정신’ 이 아닌, '모두가 함께 공존하며 같이 행복하기 위해 힘을 합쳐 애쓰는 정신'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글로벌화된 현대사회에서 봉사정신이란 과연 ‘자신을 돌보지 아니하고 힘을 바쳐 애쓰는 정신’일까, 세계시민인 우리가 가져야 할 봉사정신은 과연 과연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정신일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 과연 지속가능한 것일까?

그러한 정신이 정말 온당하고 타당한 것일까?


결국 우리의 봉사라는 것은 ‘함께 잘 살기 위해 함께 협력하고 협치하여 결국 공공의 이익에 대해 선순환을 이룩하는 일체의 행위’일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그

누구의 희생도 없이 다 함께 행복한 것이 우리가 결국 원하는 목표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진정한 봉사의 의미이자, 정의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내가 봉사의 정의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프리카에 대해서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미디어에서 지속적으로 다루곤 하는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 때문이었다.


빈곤포르노란,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그리고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자극적으로 보도하고 편집하는 자료들을 말한다. 아프리카의 빈곤문제를 연출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아프리카 사람들도 ‘동등하게 생활을 영유하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로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자료들이 포함된다.


지금껏 매체에서는 아프리카와 관련된 자료들을 보여줄 때, 대부분 굶어서 영양실조가 심각한 사람들, 야만적인 환경과 비위생적인 관념아래 살아가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보여주며 그들이 아프리카의 전부인 마냥, 그들이 곧 아프리카인 것 마냥 보여주었다.


이러한 빈곤포르노와 미디어의 행태는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해 ‘우리보다 열등하고 하등하며 불행한 존재, 그렇기에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프레임을 만들고, 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고착시킨다는 것이 문제이다. 특히 지속된 자극에 금세 무감각해지는 소비자들 덕에 자극적인 연출과 내용은 그 강도가 더욱 거세어지는 악순환을 가진다. 더불어 제대로 된 정보를 모르는 채로 자극적인 정보만을 주입받는 수용자는 그 프레임을 그대로 장착하게 된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아프리카에 대한 선입견이 형성되고 고착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은

주홍글씨처럼 짙게 남아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곤 한다.


아마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미디어와 빈곤포르노의 영향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 그렇기에 처음엔 아프리카에 직접 간다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고, 아프리카에 대해 떠올릴때면 영양실조가 심각한 아이들과 야만적이고 비위생적인 환경아래 살아가는 그들을 자연스레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실제로 가서 본 탄자니아의 모습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야만적이지도, 삶이 곧 끝나갈 것처럼 빈곤하거나 위급하지도 않았다.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부 나의 착각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문화 속에서 자신들만의 생활을 영위하며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더불어 탄자니아는 아프리카에서 꽤나 잘 사는 편에 속하는 국가였다.


특히 다리에스살람 공항에 도착하여, 차를 타고 탕가마을로 이동하는 도중이었다. 7 시간을 내달려야 하는 긴 이동시간 동안 버스 창문 너머를 구경하던 중, 커다란 나무 옆 벤치에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문득 궁금해졌다. 살아가는 환경도 언어도 문화도 다른 그들이 대화하는 주제는 무엇일까 궁금증이 생겼다. 아마 헤겔과 칸트 같은 류의 철학적 담론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잇달았다. 우리가 흔히 지적인 대화라고 일컫는 종류의 대화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대화가 우리의 대화보다 열등할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유명 철학자들의 철학과 다양한 교육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아이를 키운 부모와,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지라도, 자신들의 인생의 철학과 지혜로 아이를 키운 부모. 우리는 어느 쪽이 더 훌륭한 부모라고 감히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가? 더 고차원적인 지식이 내재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자의 부모를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 아래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 그리고 열악한 환경 때문에 삶이 불행할 것이라 생각한 건 모두 나의 선입견에 불과했다. 아니 이는 선입견을 넘어, 그릇된 고정관념이자 크나큰 실수였다.


편견, 선입견은 모두 볼 견(見)자가 들어있다.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특히 바르게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직접 가서 보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본다는 행위란 단순히 시각이라는 감각을 넘어서서, 나만의 관념과 철학을 통해 세상을 수용하고 고찰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인생의 경험들을 통해 내 가치관과 생각들을 정립하며, 쌓아온 가치들을 토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번 현장활동을 통해 바르게 보기 위해서는 많이 보고, 많이 듣고, 많이 사유하며, 많이 경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많이 보고 경험해야만 선입견에서 탈피할 수 있으며, 많이 듣고 사유해야만 비로소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활동을 통해 나는, '선입견이나 편견을 넘어서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만의 가치로 바라보고, 숨어있는 진짜 문제들을 찾아내는 일. 그리고 그 문제들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세상을 바르게 바라보고, 올바른 솔루션을 도출해내는 광고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목표 말이다.


광고기획이란 결국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합적 솔루션을 제시하는 일이기 때문에,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기 앞서 먼저 문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점철된 시야는 진짜 문제를 바라볼 수 없게 만들 것 이며,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책 '오만과 편견' 에서는 “오만은 타인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고 편견은 내가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 탄자니아 현장활동은 나로부터 오만과 편견, 그리고 선입견에 대해 한 발짝 넘어설 수 있게 만드는 기회였다. 비록 넘지는 못했을지 언정, 적어도 무엇이 편견이고 선입견인지 인지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세상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경계하며, 올곧은 시야를 가지는 기획자가 되고자 한다. 덧붙여 다른 사람들도 함께 세상에 대해 바른 시각과 식견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기획자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