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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

제 1 호 여성들의 만년필 이야기

  • 작성일 202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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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7940
임지혁

임지혁 명예기자 (201710846@sangmyung.kr)



우리는 필기구를 어떤 경우에 사용할까? 보통 글을 적어야 하거나 문서에 서명을 해야 할 경우 펜을 손에 잡게 되는 것 같다. 요즘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있기에 필기구를 쓰게 되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이는 동시에 과거에는 그 역할을 온전히 필기구가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오늘날 이 전자기기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듯이 과거에는 펜 한 자루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으며, 우리가 예쁘고 성능 좋은 휴대폰을 사고 싶어하는것 처럼 옛날 사람들은 예쁘고 성능 좋은 펜 한 자루를 갖기를 염원했다. 촉을 금으로 만들고 겉은 화려하게 치장된 만년필에 그 관심과 지출이 집중되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금의 상명대는 과거의 상명여대가 남녀공학화된 것으로서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에 자하 교정은 여성들만의 캠퍼스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일반적으로 많이 판매된 만년필에 관한 이야기는 여럿 찾아볼 수 있지만 우리들의 선배들이 갖고 싶어 했을, 여성들이 선호했을 만년필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찾아볼 수 없다. 과연 우리들의 선배들이 갖고 싶어서 밤잠을 설쳤을 만년필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역사속의 만년필들


1920년에는 미국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되면서 여성들에게 참정권의 기회가 보장되었다. 이는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증대됨을 의미했으며 동시에 만년필을 사용할 일도 늘어남을 의미했다. 1920년대에 미국의 만년필회사인 파커와 쉐퍼, 콘클린 등은 이 시기 앞다투어 '레이디'라는 이름을 가진 만년필을 내놓았다. 이들은 남성용의 만년필보다는 살짝 작았으며 그만큼 살짝 더 저렴했고, 클립이 없는 대신 위에 고리가 달려서 목걸이에 고정한 채 휴대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당시의 미국에서 가장 큰 점유율을 가지던 회사는 워터맨이었는데 이 회사에서는 시장을 관망하다가 1930년에 이르러서야 뒤늦게 '레이디'라고 이름 붙인 만년필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회사는 대응이 너무 늦었다. 워터맨은 결국 1950년대에 이르면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미국에서의 사업을 철수하고 유럽으로 그 무대를 옮긴다.


1924년 파커 레이디 듀오폴드 광고 [사진 출처: PenHero.com]


1940년대는 전쟁의 시기였다. 남성들은 징집되어 전쟁에 동원되었고 여성들이 사회 산업구조의 곳곳에 투입되어 이전보다 다양한 역할을 요구받았다. 이 시기에는 직접적으로 'Lady'나 'For women'과 같은 문구보다는 'Tuckaway'나 'Demi'와 같은 중성적인 단어가 제품명으로 선정되어 판매되었다. 이러한 만년필들은 여전히 일반적인 모델보다는 약간 크기가 작았지만, 실용적이게 클립이 있는 경우가 많아졌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일반 모델들과 동등한 수준으로까지 높아졌다. 


1960년대 파커 45 레이디 만년필

1960년대는 68혁명으로 대표되는 기성세대와 청년세대가 뚜렷한 차이를 보이던 시기였다. 청년세대들은 68혁명을 진행하며 반체제-반문명 운동을 진행했지만 기성세대는 베트남전쟁을 벌이고 달에 사람의 발자국을 남겼다. 이 시기에 가장 대표적인 만년필은 파커의 75라는 만년필인데, 이 만년필의 촉은 금으로 만들어졌으며 몸체는 순은으로 제작되어서 25$의 가격이 책정되었다. 당시의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던 기성세대는 기존보다 고급스럽고 비싼 만년필을 원했고 이는 여성용 만년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파커의 레이디 45라는 모델은 파커 45라는 저가 만년필에서 클립을 제거하고 외관을 금속으로 고급스럽게 치장한 제품인데 이 만년필의 정가는 7.95$~15$로 일반 모델의 1.6배~3배 가까이 비싼 가격에 판매되었다. 파커의 경쟁사였던 쉐퍼 또한 레이디 쉐퍼라는 모델을 파커보다도 먼저 10$~110$의 가격에 내놓으며 고급 수요를 노리고자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20년대 가장 늦게 레이디 만년필을 만들었던 워터맨은 반세기도 넘게 지나서는 가장 본격적으로 여성을 위한 만년필을 만든 제조사가 되었다. 워터맨의 레이디 시리즈는 디자인과 소재 등에 따라서 다양한 모델들이 존재했으며 별도의 휴대용 케이스를 동봉하는 'Agathe'라는 모델이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불운히도 이 아름다운 만년필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 같다. 이 만년필들은 1980년대에 본격적으로 판매되었지만, 여성의 수요를 자극할 수 있는 시대적 사건이 없었고, 동시에 이 아름다운 만년필조차도 그 수요를 자극해내지 못했다. 



우리 곁의 만년필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어떨까? 우리는 이미 만년필에서 손을 놓은 지 오래되었지만 최근 만년필 시장은 분명 활기를 띠고 있다. '예쁜' 만년필로 '예쁜' 잉크에 '예쁜' 글씨를 써서 SNS에 공유하거나 스스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캘리그래피 문화가 여성들을 위주로 지난 5년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특히나 유독 인기를 끌었던 펠리칸의 분홍색 만년필은 이미 웃돈을 얹어 거래되고 있고, 몽블랑의 '어린왕자 에디션'도 고가정책에도 불구하고 성황리에 판매되고 있다. 이들의 거래가는 이미 기존의 남성들에게 인기가 있던 전통적인 만년필의 가격을 넘어선지 오래이다.

2015년 펠리칸 M600 핑크 만년필 [사진 출처:pelikan-passion.com]

1980년대까지의 여성의 만년필은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고, 결코 주류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의 흐름은 그렇지 않아서 ‘예쁜 만년필들’은 이미 주류이면서도 안정적으로 만년필 시장에 편입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선배들이 꿈꾸었을 만년필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갓 출시된 저 아름다운 만년필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