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호 글구들이 모이는 곳, 자하 교지
정기자 임지혁 201710846@sangmyung.kr 왜 우리는 글을 쓸까? 초고로 작성했던 두 원고에 X자를 긋고는 뚜껑을 뒤에 꽂아둔 파란색 만년필을 지긋이 바라보며 잠시 생각해 보았다. 자하교지는 자하골에 있는 어느 학교의 언론 기관이다. 매년 주제에 맞는 글구를 적어내고 그것들을 모아 편집하고 교정하면서 아담한 책 한 권을 내보이는 일을 하고 있다. 사실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느릿느릿, 다른 사람이 작성한 원고들을 보면서 문장이나 심지어는 단어 단위로 참견을 하면서 모두가 납득할 수 있을 정도의 글을 탈고하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코 빠르지 않게 찬찬히 글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이 정해지게 되고 곧 그것이 모여서 교지의 색을 이룬다. 교지가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다. 학교에 대한 이야기, 세상만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학술적이거나 문학적이고 심지어는 개인적인 이야기까지도 자하교지는 다룬다. 소속된 기자들이 탈고한 이야깃거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투고한 글로 인해서 교지는 더욱 다채로워진다. 학교라는 맥락 속에서 누군가가 생각해 낸 좋은 글, 혹은 작품은 무엇이든지 교지에 담길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잡지보다는 먼 옛날 청기사[1]와 같은 연감과 비슷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2023년 7월에는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은퇴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가 일본에서 개봉했다. 아직 한국에서 방영되지는 않았고 그 내용 또한 필자는 알지 못하지만 미야자키 감독은 “손자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한다.[2] 필자도 영화를 보기 위해 현해탄을 넘어볼까 고민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러지는 못한 채 포스터의 알 수 없는 새의 그림과 지긋이 적힌 제목만을 곱씹어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 내가 지금 적어가야 하는 글은 어떤 글이 되어야 할까? 그렇게 완성된 우리들의 연감은 어떤 모습이어야 우리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요즈음이지만 우리들의 작은 연감을 우리들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편찬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앞으로의 자하의 방향성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포스터. 사진=Studio Ghibli 교지는 왜 글을 쓸까? 자하교지는 우리 학교의 언론 기관이다. 그래서 언론 기관이라는 단어의 정의와 같이, 세상의 여러 일들에 대한 정보를 취재하며 그것에 자신의 의견을 첨가해 독자에게 기사를 선보이는 일을 하고는 한다. 그렇기에 교지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위해서는 언론에서 글을 쓰는 사람, 즉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서 우선 궁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초의 먼 옛날에는 글을 좀 쓴다고 하는 사람들이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는 했다. 시로 유명하면서 의열단 소속이었던 이육사. 최초의 근대 장편 소설을 쓴 친일파 이광수. 남조선로동당의 핵심 인물이던 박헌영. 친일과 독립, 좌우를 막론하고 그 시절에 글을 쓰는 사람들은 기자가 되었다. 그 즈음에 역사가 시작된 우리 학교에서도 그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아마도 글재주를 가지고 있던 선배들이 언론사에 들어와서 학보에서, 교지에서 각자 자신의 글을 적어나가며 여러 기록을 쌓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하 교지의 기자라는 직책에 대해서 살짝 첨언하자면 우리 기자들은 시대의 사관을 표방하기도 한다. 한 해의 개인적인 이야기들부터 공적인 이야기들까지, 어느 순간순간을 이루는 여러 이야기들을 싣는 것 또한 그 목표로 두고 있다. 가령 지난 2016년에 있던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 시국선언문을 발표한 것은 시국에 대한 자하의 입장을 밝히는 것 또한 목표에 있었지만, 동시에 학교 구성원들과 자하 구성원들의 시국에 대한 의견을 역사에 기록하는 것 또한 주된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글을 좀 쓴다고 하는 시대의 사관들, 아무래도 그것이 교지나 더 나아가서는 언론사와 기자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칭찬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글재주를 가지고는 당대 학생운동, 각종 창작물, 학술논문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하고 다듬어서 교지 한 권에 담아내던 우리들의 선배들은 필자가 존경하고 동경하는 그 대상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기대와는 다르게 작금의 기자라는 직업의 권위는 가히 매우 낮다고 표현해야만 하겠다. 2023년 연초에 한겨레의 편집국 간부는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의혹의 중심에 있는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와 2019~2021년경 9억 원 규모의 비정상적인 금전 거래를 진행한 것으로 드러났다.[3] 조회수를 높이기 위해 자극적인 제목을 선정하거나 충분한 취재를 진행하지 않고 기사를 작성하는 경우, 私적이거나 社적인 의도를 지니고 기사를 작성하는 등 언론 윤리에 부합하지 않게 기사를 작성하는 일들은 특별히 언급하기도 애매할 정도로 일상적이다. 우리들은 그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울까? 물론 자하 교지, 나아가서 교내 언론사들이 화천대유나 여러 부적절한 비리 사건과 연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우리 교내 언론사들의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그 첫 화면을 보았을 때, 근래의 주요 언론사들의 홈페이지와 같이 자극적이고 사적 감정이 담긴 기사들로 가득 찼다면 그것은 언론이 지향했던, 그리고 지향해야 할 방향성은 아닐 것이다. 혹은 그것이 학교의 홍보 페이지와 다를 바가 없다면 우리 언론이 존재해야 할 필요성을 지우는 일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들은 오늘날 기울어 가는 기자라는 직업의 권위, 그 현상에서 전혀 자유롭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가령 교내 구성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들을 들어볼 수 있을 독자 투고는 그 비중이 줄어들었고, 교내 정책에 대해 언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사들도 역시 줄어들고 있다 모든 것들은 그 자신의 대가를 치룬다. 언론은 그 자신의 신뢰를 깎으며 그 자신의 대가를 치루고 있다. 이 현황 속에서 교지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지난 2022년 겨울 동계 교내 언론 세미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내부적으로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 못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낸 것. 일일히 상세하게 언급하기 어려울 많은 논의들이 있었고 지금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하지 못하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할 수 있는 일들에 더해서 우리들 스스로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결정했다. 학교에 대해서, 교지에 대해서. 우리들 스스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는 이번의 기획 기사가,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내놓은 방향성이 담길 2023년의 자하가 그 해답의 이정표를 제시하는 것이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자하교지가 글구들이 모일 곳이 되기를 소망한다. [1] 20세기 초 중부 유럽 일대의 예술가들이 발간한 표현주의 예술 연감. 화가 바실리 칸단스키가 주축이 되었다. [2] 이종길. “미야자키 하야오 10년 만에 신작 “손자를 위해”” 「한겨레」 2022년 12월 13일. https://www.asiae.co.kr/article/2022121322424671356 [3] 한겨레신문사. ” 독자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한겨레」 2023년 01월 06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74728.html
제 5 호 변화하는 강의실 내 필기 문화, 변화하는 우리
수습기자 이선민 202115029@sangmyung.kr [강의실 내 필기하는 모습의 변화] “타닥타닥, 사각사각”하며 들리는 소리를 강의실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강의 도중에 들리는 이 소리가 수업에 집중하는 학생들의 열정을 반증하지만, 때로는 귓가를 자극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기도 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강의실 내에 소음 문제로 대학생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 하루에도 몇 개씩 불만 사항이 담긴 글이 올라오곤 한다. 강의실뿐만 아니라 열람실, 라운지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강의실 안에서의 전자기기 사용 빈도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 뒤에는 어떤 배경이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자. 과거에 대부분 학생은 수업 자료를 프린트하기 위해 아침마다 프린트 기계 앞에서 줄을 서며 수업에 늦을까 봐 발을 동동거렸던 시절도 있었다. 고작 몇 년 안 된 2010년대의 이야기이다. 자료를 프린트해서 수기로 필기하는 모습은 일상적이었고, 교수도 필기를 위한 전자기기 사용을 꺼리는 모습이었다. 당시 교수에 따르면, “일단 전자기기를 사용하게 되면 강의를 듣던 도중이라도 쉽게 이른바 딴짓의 유혹에 넘어간다고 하였다.” 또한 “수업 내용을 받아 적으면서, 예쁘게 누군가 볼 것처럼 적는 데 집중하여 중요한 강의 내용은 정작 한 귀로 듣고 흘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필기 문화가 바뀐 기점을 생각해 보면 가장 큰 시점은 IT 기술의 발달과 비대면 환경의 활성화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020년대 들어서 주변만 살펴봐도 전자기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학생을 찾는 게 빠를 정도로 높은 소지 비율을 자랑한다. 내가 듣고 있는 수업의 강의실을 둘러보면, 어느덧 모든 수강생이 전자기기를 사용하며 수업을 듣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많은 학생이 전자기기를 사용함에 따라 제재를 가하는 부분은 확실히 줄었고, 이러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변했다. 이번 기사에서 전자기기 사용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기사를 전개하고자 한다. 즉 ‘전자기기의 사용이 올바른 학업 환경을 조성하는가?’가 중심 주제이다. [전자기기 사용이 올바른 학업 환경을 조성하는가?] 본론에 앞서 ‘디지털 전환’이라는 단어를 먼저 알고 가자. 디지털 전환이란 1990년대 처음 등장한 개념으로 디지털 기술을 사회 전반에 적용해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혁신하는 것이다.[1]디지털 전환은 전산화와 디지털화를 거쳐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급변하는 기술 발전에 따라 우리도 그것에 맞게 생활이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덧 초, 중, 고등학교에서는 태블릿을 사용하여 수업을 듣고, 필기하고 숙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 현상을 본다면, 대학생이 전자기기를 사용하여 필기하고 공부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최근 코로나19 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화상 회의, 온라인 수업처럼 비대면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그로 인해 학생들은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미디어 매체에 노출되는 비중이 높아졌다. 현재 상명대학교에 재학 중인 A 학생의 말에 따르면,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많은 양의 책의 무게를 줄이고, 필기하는 동시에 필요한 정보를 바로 추가할 수 있는 효율적인 장점이 있다고 한다. 이제는 종이책이 아닌 전자책 형식으로 전자기기에서 필요한 수업에서 꺼내 보고,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학생들에게는 가장 크고 매력적인 장점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전자기기 사용이 올바른 학업 환경을 조성하는 데 방해를 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누구든 전자기기 사용 중 원래의 목적과 다르게 SNS나 웹서핑하게 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전자기기 자체의 변화가 빠르고, 그에 따라 제공되는 소프트웨어나 콘텐츠 역시 수시로 변화하기에 새롭게 흥미를 끄는 콘텐츠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또한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강의실 및 라운지 내 전자기기 사용에 따른 소음 문제 이슈도 발생하고 있다. 학교 내 공간은 많은 학생이 함께 이용하고 있다. 누군가는 다른 이의 필기 소리에 오히려 집중력을 잃고,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소음 문제는 단순히 어떤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공용 장소를 이용하며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문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언제까지 전자기기의 사용을 부정적으로만 볼 것인가?] 디지털 전환이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일상은 디지털화되고 있다. 디지털화는 현재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도 고도의 발전을 이룰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기에 시대적 변화에 따라 우리의 학습 체득 방식과 교육 방식의 변화는 당연하다. 그렇기에 나는 전자기기 사용이 현재 상황에 시기에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해당 변화의 맥락을 잘 파악한 여러 지자체에서 학생들에게 태블릿과 같은 전자기기를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현재 서울의 ‘디벗 사업’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디벗 사업’은 디벗(디지털+벗)으로 서울시에 있는 중학교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태블릿PC를 대여해 수업이나 공부에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위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이 주도적으로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수동적 학습보다는 능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본인의 궁금증 채워 나가면서 단순히 전자기기를 여가의 수단이 아닌 생산적 학습 경험의 도구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한다고 한다.[2]디지털화 된 세상에서 전자기기의 사용이 불가피하다면, 학습 목적에 맞게 기기의 사용에 대한 교육과 장려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상명대학교에 계시는 B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디지털화 흐름에 따라 수업이 변화함을 알 수 있었다. B 교수님은 학생들의 전자기기 사용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신다고 하셨다. 이미 사회가 변했고, 학교 밖 세상은 모두 디지털화되었기에 전자기기를 사용하는 학습 방법은 당연한 변화라고 하셨다. 현재 사회 어디에 가도 이제 전문 분야에서는 종이를 사용하기보다는, 모두 디지털 기기를 사용해서 정보를 저장하고 공유하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하셨다. 또한 미래 사회의 학습은 과거와 같이 암기하고 이해하는 학습이 아니라 누군가와 소통하고 많은 정보와 데이터를 학습하고 이를 기초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이를 위해서는 수업 중 전자기기의 사용은 필수 불가결한 것이라는 말씀해 주셨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전자기기 사용이 가능할까?] 기사를 작성하면서 ‘어떻게 하면 수업 시간에 전자기기를 문제없이 사용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도 변화에 발맞춰 맥락을 잡아 따라가야 한다. 그렇기에 서론에서 언급한 수기로 필기하는 활동이 전자기기의 사용으로 변화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당연한 순서다. 우리가 수업 시간에 전자기기를 목적과 다르게 사용하는 이유에는 수업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습관 또는 태도의 문제가 아니겠냐고 생각했다. 핸드폰을 예로 들어,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에 학교에서 종종 ‘스마트폰 중독 검사’를 실시해서 학생의 중독 정도를 판단하곤 했다. 즉 수업 시간 도중 목적에 맞지 않은 전자기기의 사용은 평소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 습관의 연장선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르게 전자기기를 사용하여 수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스스로 통제할 수밖에 없다. 수업을 위한 전자기기 사용은 절대적으로 유익하고,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수업 시간에 전자기기를 보다 효율적이고 올바르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놓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또한 ‘에브리타임’에도 자주 올라오는 강의실 및 라운지 내 소음 문제에 대해 사용자의 배려가 필요하다. 키보드의 타자 소리가 너무 크다면 ‘키보드 키스킨’ 사용을, 태블릿의 필기 소리가 거슬린다면 펜촉에 일명 ‘튜브’를 끼우는 것과 같은 소음을 줄이는 여러 가지 방안을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지 제시하고 싶다. 나에게는 별거 아니라고 느껴지는 소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소음으로 들릴 수 있고, 하나의 소리가 여러 명의 사용으로 하나의 소음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서로의 편리한 전자기기 사용을 위한 서로의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홈페이지(tta.or.kr) [2] 김지광, 스마트기기 휴대 학습 「디벗」, 어떤 정책인가요?, 서울교육, 2021 [참고 문헌] 1) 김지광, 스마트기기 휴대 학습 「디벗」, 어떤 정책인가요?, 서울교육, 2021, https://webzine-serii.re.kr/%EC%8A%A4%EB%A7%88%ED%8A%B8%EA%B8%B0%EA%B8%B0-%ED%9C%B4%EB%8C%80-%ED%95%99%EC%8A%B5-%E3%80%8C%EB%94%94%EB%B2%97%E3%80%8D-%EC%96%B4%EB%96%A4-%EC%A0%95%EC%B1%85%EC%9D%B8%EA%B0%80%EC%9A%94/#easy-footnote-bottom-3-10849 2) 김현정 기자, 서울 중1 56.5%, 스마트기기 활용 '디벗 사업' 만족...학부모는 '글쎄', 메트로 신문, 2023-05-14, https://www.metroseoul.co.kr/article/20230514500251 3) 홍상순, 칠판 대신 스마트 기기, 달라진 교실 풍경, 울산 MBC, 2023-05-15, https://www.usmbc.co.kr/article/ip_HetGW_N7Q_or2E-q 4) 한규정. (2014). 스마트 기기 활용교육이 학생에게 미치는 역기능, 정보교육학회논문지, 18(4), 471-482. 5) 샤넬 디파수필 and 이현정. (2021),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국내 대학생의 온라인 학습 현황, 인문사회 21, 12(4), 1265-1276. 6) 김영록, 정미현, & 김재현. (2013), 스마트기기의 교육적 이용 실태 및 활용 방안 연구, 인터넷정보학회논문지, 14(3), 47-55. 7) 메인사진_https://www.nytimes.com/2017/11/22/business/laptops-not-during-lecture-or-meeting.html
제 5 호 우리의 자하(紫霞), 자줏빛 노을은 어디에서 왔을까?
수습기자 이다현 202110233@sangmyung.kr <상명대학교와 보랏빛 노을, 紫霞> “이번 정류소는 자하문 터널 입구, 석파정입니다.” 많은 상명대학교 학생이 이용하는 7016번 버스를 타면 다음과 같은 안내를 들을 수 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조금만 걸으면 인문사회대학관, 자하관이 나타난다. 가끔은 샘물 메시지로 자하 교지가 발간되었다는 소식이 도착한다. 우리는 학교에 오며 자하를 마주한다. 심지어 얼마 전 자하관에 생긴 라운지 이름마저도 자하와 비슷한 자운(紫雲)이다. 자하가 무엇이길래 우리의 곁에 존재하는 것일까? 학교에서 자동차로 약 10분, 종로구 청운동에는 사소 문 중 하나인 창의문이 있다. 창의문은 북문(北門), 장의문(藏義門) 혹은 자하문(紫霞門)으로 불린다. 장의문이라는 이름은 안쪽에 장의동이 있어 만들어진 별칭이다. 왕조의 공식 문서에는 없지만, 민간에서 가장 널리 불린 이름은 자하문이다. 자하문 별칭의 유래는 다양하다. 이 중 가장 신빙성 있는 유래를 꼽자면 다음과 같다. 개성의 송악산 아래에 있는 명승 자하동처럼 골이 깊고 수색이 맑고 아름다워 이름이 붙은 자핫골에 위치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름에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안고 있는 자하문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가진다. 이성계는 개경을 떠나 한성을 새롭게 도읍으로 정하는데 경복궁을 비롯한 한성의 성곽과 성문을 쌓았다. 그때 동쪽의 흥인지문(興仁之門), 남쪽의 숭례문(崇禮門), 서쪽의 돈의문(敦義門), 북쪽의 숙청문(肅淸門)이라는 사대문을 만들고, 그 사이 동북쪽에 홍화문(弘化門), 동남쪽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쪽에 소덕문(昭德門), 서북쪽에 숙정문과 돈의문 사이에 위치하는 자하문(紫霞門)이라는 작은 문을 만들었다. <紫霞의 과거부터 현재까지> 조선시대의 자하문은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든든한 성문보다는 고요한 성문이었다. 자하문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건설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폐쇄된다. 성을 짓는 일과 같은 때에만 한시적으로 개방되었고, 연산군 때에는 근처에 사는 이들을 모두 쫓아내기도 했다. 이후 자하문이 역사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인조반정 때이다. 1623년(광해군 15년) 김류와 이귀 등이 광해군의 폐위를 논의하고 홍제천에 모인 후 자하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창덕궁을 공격했다. 『인조실록』 1년(1623년) 3월 13일의 기록에는 ‘밤 3경에 창의문(자하문)에 이르러 빗장을 부수고 들어가다가, 선전판으로서 성문을 감시하는 자와 마주쳤다. 선봉 부대가 그를 참수하고 드디어 북을 울리며 진입하여 곧바로 창덕궁에 이르렀다.’라고 쓰여있다. 이후 창의문은 양란을 거치고, 영조 대에 이루러 개축되는 등의 변화를 거쳤다. 고요하던 자하문이 다시 소란스러워진 것은 해방 이후 1968년 1월 21일이다. 북한의 특수부대인 124 군부대 소속의 31명은 청와대 습격과 암살 명령을 받고, 휴전선을 넘어, 수도권까지 잠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검정 고개의 자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검문을 받고 그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검문 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많은 시민이 살상당하기도 했다. 이후로 한국전쟁에 대한 공포가 전국을 강타했다. 자하문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폐쇄되었고, 청와대 보호를 명목으로 한 스카이웨이 건설로 경관이 크게 손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자하문 자체에 대해서는 지붕과 기와를 교체하는 등의 보수 공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하문이 다시 사람들을 맞이한 것은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청와대 주변 지역이 개방된 시점부터였다. 1993년에 사적공원으로 조성되어 완전히 개방되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자하문은 어떨까? 학교에서 자하문까지 가는 길, 여러 가지 중 하나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우선 학교에서 언덕을 내려가 직진한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석파정 서울미술관이 보인다. 미술관을 지나 계속 걷다 보면 레이지버거클럽, 고블린 피자, 란저우육면, 부빙 등 유명 맛집이 등장한다. 식사 시간이라면 이곳 중 하나를 골라 식사하고 다시 길을 걸어보는 것도 권하고 싶다. 식사를 즐겁게 마치고 나왔다면 윤동주 문학관을 지나, 서울의 전경이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 최규식 경관 동상이 보이는 길을 건너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하문이 나온다. 위 사진들은 지난 6월 자하문을 방문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1학기에 동기와 함께 길을 걸었을 때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리며 길을 걸었다. 길을 거닐며 첫 번째로 느낀 것은 ‘너무 습하고 덥고 힘들다!’ 였지만, 풍경은 아름다웠다. 초목이 우거져 초록빛이 가득했다. 여기가 정말 서울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하문은 엄청나게 웅장하다거나, 주변의 건축물이 풍성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부터 자하문까지의 거리는 고요하고, 푸르고, 아름답다. 또 근처 청운공원에서 가벼운 소풍을 즐길 수도, 더 걸어 서촌을 찾을 수도 있다. 혼자 사색을 즐기며 걷기도 좋고, 동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걷기도 좋은 곳이다. 강의가 일찍 끝났거나 우주공강이 생긴 날에 한 번쯤 찾기 좋다. 자하문을 그저 학교 가는 길 지루한 길목 중 하나로 여기는 것보다 대학교 다닐 적 추억의 장소로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 <紫霞와 자하교지> 우리가 그저 스쳐 지나갔던 자하는 기나긴 시간부터,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까지 품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 받은 이름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흐린 날 노을은 가려지고, 맑은 날 노을은 무엇보다 빛난다. 자하문은 풍수지리를 이유로 폐쇄되기도 하고, 역사를 바꾼 중요한 장소가 되기도 했으며, 다시 폐쇄되었다가, 현재는 또다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자하문은 역사 속에서 묵묵히 저의 자리를 지키며 가장 빛나고 사연 많은 성이 되었다. 숭례문 문루가 불타고 복원된 현재 자하문 문루는 한양도성 문루 중 가장 오래된 문루이다.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곳도 자하문이다. 하지만 고가도로의 건설 등으로 경관이 많이 훼손된 곳 또한 자하문이다. 과거 우리는 인간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개발에만 집중했지만, 현재는 공존을 가치로 두고 있다. 과거와 공존, 자연과 공존은 오랫동안 함께하기 위함이고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필수적이다. 가장 오래되었고, 여러 이야기 담긴 자하문의 앞을 가로막은 고가도로를 정리하는 등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는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는 한양도성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자하문이 아름답기만 한 자줏빛 노을이 아니라, 해가 지며 모든 것에 스며드는 자줏빛 노을이라는 생각한다. 상명대학교의 ‘자하’ 교지편집부는 모든 것에 스며드는 자줏빛 노을답게 52년 전통을 이어가고 있으며, 사회와 학교 전반에 스며든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회로부터 소외된 소수자부터,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이야기까지. 앞으로 자하 교지편집부는 흐리고, 맑은 날을 가리지 않고 노을을 빛내며, 언제나처럼 저의 자리를 지키는 자하문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전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참고 문헌 ] 1. 서울 한양도성[웹사이트]. (2023.5.7). https://seoulcitywall.seoul.go.kr/content/8.do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웹사이트]. (2023.5.1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7307 3. 한양도성박물관 (2015), 창의문과 사람들 : 2015년 한양도성박물관 상반기 기획전, 서울: 한양도성박물관
제 5 호 “도전! 상명대에서 천 원으로 아침밥을 먹어보다!”
수습기자 김나현 202210152@sangmyung.kr 대학생의 청년빈곤, 생계를 위한 결식 대학생은 미성년의 상태로 성년이 되었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대학교에 입학한 새내기는 특히 돈을 벌 수 있는 수단과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이 경제적 문제를 겪곤 하는데, 이는 곧 청년 빈곤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학교 근처에서 자취하는 경우라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는 어른들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몸소 느끼게 될 것이다. 2021년 동아일보와 잡코리아가 진행한 설문에서, 청년 빈곤을 겪는 대학생들은 대부분 재정이 부족할 때 가장 먼저 식비 지출을 줄이려고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를 고려해 보면 그들이 몇 번의 끼니를 거르거나 대충 때우게 되는 것은, 안타깝게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즉, 조금이라도 식비 지출을 줄여야 하는 빈곤 상황에 부닥친 청년들에게 잘 차려진 한 끼 식사는 그저 사치로 분류된다. 건강한 현대인의 생활을 위해 하루 식사는 아침, 점심, 저녁을 기준으로 세 번의 식사를 권장한다. 사정에 따라 비록 한 끼만 먹게 되더라도 영양소를 잘 챙겨 먹는 것이 필요하고, 특히 아침밥은 당일 에너지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필수적이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동시에 경제적 빈곤을 겪는 대학생의 대부분이 지키기는 현실적으로 힘들다. 정작 청년들은 최소한의 아침밥조차 챙겨 먹기 힘든 현실에서 살고 있다. 청년 빈곤을 겪고 있는, 혹은 여러 사유로 인해 아침 식사 결식률이 높은 대학생에게 양질의 아침 식사를 천 원에 제공하여 젊은 층의 아침식사 습관화를 지원하자는 취지의 사업이 바로 ‘천원의 아침밥’ 이다. 상명대학교의 ‘천원의 아침밥’ ‘천원의 아침밥’ 사업은 대학교와 농림축산식품부 및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이하 ‘농림부’)이 공동 지원하여 대학생에게 쌀과 쌀 가공식품을 활용한 양질의 아침 식사를 제공해 쌀 소비를 확대하고 학생들의 식비 부담을 낮추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청년 빈곤으로 인한 아침밥 결식률 감소와 쌀 소비 촉진, 해당 두 가지의 긍정적인 의도로 시작한 천원의 아침밥 사업은, 농림축산식품부 주도로 진행한 만족도 조사 결과에서 전반적인 모든 항목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우리 학교 역시, ‘천원의 아침밥’ 시행 공지가 대학생 익명 커뮤니티(‘에브리타임’)에 게시된 후에 사업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주를 이뤘고, 해당 공지글에 이목이 집중되어 단시간에 ‘HOT 게시판’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천원의 아침밥’이 학생들의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 경제적 곤란에 도움을 준다는 뜻에서, 본격적인 사업 시행 전임에도 ‘천원의 아침밥’에 대한 우리 학생들의 높은 관심도를 보여주었다. 상명대학교는 2023·1학기 5월 1일부터 ‘천원의 아침밥’을 시행했다. 상명대학교 ‘천원의 아침밥’은 본교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매일 선착순 100명에 한하여 미래백년관 5층 학생식당에서 단돈 1,000원에 아침밥을 먹을 수 있도록 진행되었다. 업체 측의 인건비 절감과 동시에 한정된 예산 내에서 질 좋은 식사 제공을 위하여, 시행 요일은 일주일 중 평일에 해당하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인 4일로 한정했고, 시간은 8:30~11:00(소진 시까지), 10:00~11:00 총 두 타임으로 나눠 시간별로 메뉴를 달리 제공했다. 8시 30분부터 11시까지는 쌀 가공 빵과 우유, 후식으로 과일 푸딩을 제공했고, 10시부터 11시까지는 매일 달라지는 단품 메뉴와 2찬을 추가로 제공했다. 8시 30분부터 제공되는 빵식은 바쁜 아침에 학우들이 빠르고 간단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10시부터 제공되는 밥식은 이른 아침 수업을 마친, 혹은 오전 수업에 가기 전 배를 채우러 온 학우들에게 든든함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적절한 시간 분배와 메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천 원으로 아침밥을 먹어보다!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사업 시행 기간에 여러 차례 방문하여 천원의 아침밥을 먹어봤다. 이하의 내용은 상명대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으로서, 사업에 대한 나의 경험과 감상을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1. 상명대학교 학생이 천원의 아침밥을 먹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교내 학생식당 내에 키오스크로 식권을 구매해야 한다. 단돈 1,000원으로 식권을 구매한 뒤 8시 30분부터 아침을 배식받는 시스템으로 진행됐다. 우리 학교에서는 1,0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더하여 특별 식사비 지원 이벤트도 진행했는데, 이 이벤트의 이름이 바로 ‘상명이 쏜다’이다. <‘상명이 쏜다’ 홍보 이미지> ‘상명이 쏜다’란, 총장님을 비롯한 교무위원분들께서 매주 1회, 학생이 부담하는 1,000원을 지원하는 이벤트이다. ‘상명이 쏜다’는 천원의 아침밥 사업에 대한 인지도 상승을 통한 사업의 성공적인 운영 도모와 학생 복지 강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하여 학생들의 학교생활 만족도 제고를 위해 시행된 우리 학교의 특별한 이벤트였다. 사진 속에 기재된 날에 맞춰 가면 무료로 든든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해당 공지를 보고 나도 ‘상명이 쏜다’ 이벤트 날에 맞춰 간 경험이 있는데, 해당 일자에는 따로 식권을 구매하지 않고 무료로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으며, 식권 구매 대신 배식 받는 곳에 가서 날짜, 학번, 전공, 이름만 작성하면 됐다. 2. 키오스크로 식권을 받았다면, 사진 속 ‘오늘의 메뉴’가 적힌 곳 앞에 순서대로 줄을 서서 아침밥을 배식받으면 된다. 미래백년관 학생식당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면 알겠지만, 저곳은 평소 점심 학식의 푸드코트 메뉴를 배식받는 곳이다. 파란색 가이드라인 안쪽으로 줄을 선 다음 수저를 챙기고, 식권을 내고, 배식을 받으면 된다. 천원의 아침밥 배식 요건이 학식을 먹을 때와 비슷하여 딱히 번거로움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사업의 특징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3. 식권을 받고 순서가 다가오면 마침내 ‘천원의 아침밥’을 받아볼 수 있다. 앞서 서론에 언급했듯이, 우리 학교의 ‘천원의 아침밥’ 메뉴는 크게 빵과 밥, 두 가지이다. 8시 30분부터 소진 시까지 제공되는 빵식은 쌀 가공 빵과 우유, 후식으로 과일 푸딩까지 함께 나온다. ‘천원의 아침밥’ 사업 취지 중 하나인 쌀 소비량 확대를 위해 쌀로 가공한 빵으로 제공하는 것 같았다. 쌀 가공 빵은 쌀로 만든 슈크림 빵이었고, 쌀 슈크림은 생소하다는 생각에 걱정했는데 거부감 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슈크림 빵이었다. 쌀로 만들어졌다는 게 안 믿길 정도로 슈크림 맛과 비슷했는데, 오히려 기본 슈크림보다 쫀득한 느낌이라 더 맛있게 느껴졌다. 우유와 과일 푸딩은 특별한 점 없이 모두가 알 수 있는 맛이었다. 크기가 작은 빵이라서 아침으로 괜찮을지 걱정했는데, 빵만 주는 게 아니라 우유와 푸딩까지 함께라서 전체적인 양이나 만족도가 부족하지 않았다. 빵식의 세 가지 구성 모두 바로 먹어야 하는 게 아니라 가지고 이동할 수 있어서 수업 가기 전에, 혹은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먹으면 배고픔이 가실 정도의 든든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서든 편리하고 간단하게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점에서 바쁜 아침에 최적이었다. 밥식은 10시부터 11시까지 제공되는데, 매일 단품 메뉴 하나와 2개의 반찬이 함께 나왔다. 내가 간 날의 단품 메뉴는 열무 비빔밥이었고, 추가로 배추김치와 으깬 두부 반찬이 나왔다. 단품 메뉴는 매일 메뉴가 달라졌고, 주간별로 나오는 학생식당 식단표로 메뉴를 확인할 수 있어서 원하는 메뉴가 나오는 날 골라갈 수 있다는 점과 매일 메뉴가 달라져 질리지 않는다는 점이 큰 특징이었다. 밥식의 메뉴는 단품 메뉴 하나를 메인으로 제공하되, 학생들의 선호도 반영되어야 하므로 제조 과정에 손이 덜 가면서도 추가적인 반찬이 필요하지 않은 덮밥, 비빔밥 종류로 준비하는 것 같았으며, 확실히 빵보다는 밥으로 아침을 먹었을 때 훨씬 든든한 포만감을 느꼈다. 내가 먹은 열무 비빔밥은 비빔밥을 안 좋아하는 나조차도 싹 비울 정도로 그 맛과 질이 좋아서 천 원이라는 강력한 가격적 메리트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둘 다 먹어보면서 빵과 밥, 무엇 하나가 더 좋고 나쁜 거 없이 각 메뉴의 확실한 특징과 메리트를 가지고 있었고 시간별로 나눠 제공함으로써 제한적인 상황에서도 선택지를 제공하고자 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여기까지가 천 원의 아침밥을 먹어본 나의 감상이다. 느낀 점을 되새겨보면서 ‘천원의 아침밥’을 경험한 다른 학우들은 메뉴 구성에 어떤 평을 내렸을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기사를 마무리하며 사실 취재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천원의 아침밥’ 사업을 통한 혜택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어서 앞서 언급한 ‘상명이 쏜다’ 이벤트 진행 날을 골라서 방문했는데, 당연히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갔다가 첫 방문 날 선착순 50명 안에 드는 것에 실패하기도 했다. 분명 9시 정각에 도착했는데도, 50개의 빵이 모두 소진되어 받을 수가 없었고 하필이면 이날 10시 수업이 있었던 터라 10시부터 제공하는 밥식도 받을 수가 없어서 수업 시간 내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있었다는 눈물겨운 일화도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학우들이 식사비 지원 이벤트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 이런 이벤트를 잘 활용하려고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아침밥을 못 받은 것은 좀 더 일찍 도착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지만, 천원의 아침밥을 받기 위해 수업 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했음에도 빈손으로 미백관을 나와서 강의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허탈함을 많이 느꼈다. 예상보다 일찍 음식이 소진된 경우에 이를 학생들에게 알리는 조치가 준비되어 있었다면, 나와 같은 학생들의 헛된 발걸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스템의 부족에 대한 아쉬움을 느꼈다.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모습> 추가로 사업 시행 과정에서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바로 쓰레기 분리수거 문제였다. 기분 좋게 맛있는 밥을 먹고 퇴식구에 갔더니 쓰레기통 한곳에 함께 버려진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 쓰레기, 우유갑 무더기가 있었고, 나는 이런 상황에 조금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모두가 바쁜 아침이기 때문에 하나하나 깔끔한 분리수거는 힘들지 몰라도, 플라스틱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를 분류하는 기본적인 부분은 지켰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 또 비슷한 사업을 하게 된다면, 이러한 부분도 고려하여 아쉬운 점이 없도록 발전해 나갔으면 좋겠다. 6월 21일을 마지막으로 상명대학교 첫 ‘천원의 아침밥’ 사업은 마무리됐지만, 대학생의 아침 결식률 감소와 쌀 소비 촉진을 목표로 한다는 좋은 취지의 사업이었던 만큼, 학생들의 반가운 참여를 전제로 하여 앞으로도 학우들에게 도움이 되는 새롭고 다양한 사업이 기획되길 바란다. [ 참고 문헌 ] 1. 사이드뷰, 아침밥의 효능 알고 계신가요? ‘천원의 아침밥’ 인기 급증, 2023.03.28,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35691877&memberNo=40708925&vType=VERTICAL 2. 학생복지팀, 천원의 아침밥 이벤트 "교무위원이 쏜다!!" 시행 안내, 상명대학교 공식 홈페이지 통합공지, 2023.05.04, https://www.smu.ac.kr/lounge/notice/notice.do?mode=view&articleNo=736263&srCampus=smu&article.offset=0&articleLimit=10 3. 학생복지팀, 2023년 ‘천원의 아침밥’ 사업 시행 안내(아침밥 식권 구매 당일만 사용 가능), 상명대학교 공식 홈페이지 통합공지, 2023.04.25, https://www.smu.ac.kr/lounge/notice/notice.do?mode=view&articleNo=736000&srCampus=smu&article.offset=0&articleLimit=10&srStartDt=2022-03-01&srSearchVal=%EC%B2%9C%EC%9B%90%EC%9D%98+%EC%95%84%EC%B9%A8%EB%B0%A5&srSearchKey=smu%2C&srEndDt=2024-02-29 4. 총학생회 선, 상명대학교 서울캠퍼스 천원의 아침밥 시행 관련 공지, 대학생 비공식 커뮤니티 공지, 2023.04.25, https://everytime.kr/370450/v/300448903 5. 주애진 기자 외 3명, 굶으며 버티는 청춘…청년 37% “돈 없어 끼니 거른 적 있어”, 동아일보, 2021.04.19,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10419/106471432/1
제 4 호 한국군이 진짜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나요?
한국군이 진짜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나요? 202010321@sangmyung.kr 편집장 주유라 네이버 지식인에 질문이 올라왔다. ‘한국군이 진짜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나요?’ 답변이 하나 달렸다. ‘아닙니다. 한국군 사령부는 강간이나 민간인 살해를 엄격히 금지했고 이를 위반할 경우는 매우 엄중한 처벌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에 6명의 사람이 눈에 하트가 달린 표정의 '좋아요'를 눌러 놓았다. 한국사 교과서에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설명을 한 줄만이라도 더했다면 이런 질문은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민간인을 학살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과는 하지 않아도 되겠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은 베트남 민간인을 학살했다. 교전 상황이 아닌 마을에서 무고한 노인, 여자, 어린이가 죽었다. 기어 다니는 채로 죽은 아기, 땅굴에 숨어 앉아있는 채로 죽은 엄마와 조카, 밥을 먹는 중에 밥그릇을 든 채로 죽은 아빠, 젖을 먹이다가 죽은 외조카. 마을 사람들의 가족이 죽고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한국 참전군에게 ‘민간인을 보호하라’라는 명령은 주어지지 않았다. 베트남의 마을 곳곳에는 증오비와 위령비가 세워졌다. “하늘까지 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는 문구가 적힌 한국군 증오비는 쭈옹딘 폭탄 구덩이 옆에 세워져 있다. 이 구덩이에서는 한국군 해병대가 민간인 36명을 몰아넣고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전쟁에 대한 기억은 국가마다 다르게 쓰이고 전승된다. 학살로부터 약 50년의 세월이 지난 2022년 현재, 우리는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을까? 1960년에 발발한 베트남 전쟁은 1975년까지 이어진다. 한국은 1964년 베트남에 비전투 부대를 파견하고 1973년까지 군대를 파견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하였다.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던 지역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이야기한다. 내 앞에서 내 부모가, 자식이, 형제가 죽었다고 말이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그날의 기억을 꺼내어 막힘없이 이야기한다. 그들이 내뱉는 문장마다 진실이 서려 있다. 그들은 알고 있다. 어디서 몇 시에 어떤 사람들이 왔는지, 무엇으로 아이, 여자, 노인을 죽였는지를 보고 듣고 말했다. 한꺼번에 몇 명이 동시에 죽었는지를 기억하며, 자신은 살려달라고 싹싹 빌어서 살았다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고 기어 다니는 네 살짜리 아이는 총에 맞아 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진실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존재 방식을 찾지요. 진실의 조각들은, 삶 속에, 사람 속에, 자연 속에 존재합니다. 이 편린들을 통해 진실은 드러나지요.’ 김현아,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199쪽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은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현지 피해 유족들의 조사에 따르면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80여 건이며 이 과정에서 9,000여 명에 이르는 베트남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베트남 전쟁 도중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한국의 교과서는 정확한 서술을 꺼리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과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 외화벌이, 한국 참전 군인의 고엽제 피해 등에 대해서는 대체로 빠짐없이 서술하고 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한 서술은 대체로 소극적이다. 2020년 출판된 미래엔 한국사(한철호 외)에서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베트남 파병으로 국군의 전력이 증강되고, 건설업체의 해외 진출과 인력 수출 등이 활발해져 경제 성장을 위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되었다. 또한 일부 한국군에 의해 많은 베트남 양민이 희생되기도 하였으며, 한국인 혼혈인(라이따이한)이 남겨졌다.” 이 서술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경제 성장과 한국 군인의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 이후에 덧붙이듯이 양민 희생을 간단히 서술하고 있다. 해냄에듀에서 2020년에 펴낸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그나마 2018년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 평화 법정’이 열린 사실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발 나아갔다. 하지만 해냄에듀를 포함해 대부분의 교과서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구체적인 민간인 참상의 정도나 수를 헤아리지는 않는다. 그러니 베트남 푹빈에서 1966년에 일어난 베트콩 소탕 작전인 ‘용안 작전’으로 인해 마을의 민간인이 몇 명 죽었는지는 알 길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한국 교과서는 불도저 밀 듯 불을 지르고 총을 쏴댄 초토화 작전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군에 의해 발생한 여러 베트남 민간인 학살 중 하나인 용안 작전은 청룡여단 2대대, 3대대, 1대대가 투입된 민간인 마을 초토화 작전이다. 19일간 선띤현의 민간인을 ‘보이는 대로 다 갈겨버리는’ 작전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한국군은 꽝응아이성 선띤현의 민간인을 학살하게 되는데, 그곳에는 주로 여자, 아이, 노인이 남아 있었다. 대체로 젊은 남자들은 군인으로 남과 북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은 사람들은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당연히 무장한 이도 없었고 누구도 한국군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정을 ‘민간인 학살’이 아닌 전쟁 중의 피치 못할 ‘민간인 피해’로 명명하는 것이 타당할까? 조국을 위해 죽은 것이라고 볼 수도 없는 민간인의 유족에게는 베트남 정부의 보조금이 지원되지도 않았다. 베트남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는 사람들은 오직 전쟁과 관련하여 활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베트남으로의 파병은 미국의 강요나 부탁에 의한 결정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미국에 먼저 파병을 제안하였다. 이승만 정부 때에도 이미 프랑스 군대가 인도차이나 공산군과 투쟁할 때 파병을 제의한 적이 있었다. 이를 이어 정당성 없이 군사쿠데타로 장악한 정권에 정통성을 갖기 위해 미국의 확고한 원조가 필요했던 박정희는 1961년 5.16 군사 정변 후 케네디와의 회담에서 베트남 참전을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군권을 장악한 1961년 5월부터 합법적인 정부가 된 1963년 12월까지 정권에 대한 역쿠데타 시도는 계속되었고, 미국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경제 자금과 주한미군 원조 획득 등을 고려하여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으로의 파병을 택한다. 파병 결정의 과정을 살펴볼 때 박정희 정부의 결정은 어쩔 수 없는 도움을 준 것이라기보다 적극적인 정치적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교과서의 서술과 사뭇 다른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2020년 출판된 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에는 다음과 같이 파병 과정을 서술한다. “베트남 전쟁이 확대되자 미국은 한국에 베트남 파병을 요청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6.25 전쟁을 도와준 나라에 보답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요청에 응하였다.” 이러한 짧은 서술 안에는 파병 결정의 과정이 생략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박정희 정부가 요청을 수용한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2020년 출판된 금성출판사 고등학교 한국사에는 “박정희 정부는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베트남 전쟁에 국군을 파병하였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과 함께 경제성장을 강조하는 교과서의 서술은 베트남 민간인의 피해와 고통을 외면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과서의 서술은 한국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한국의 시선에서만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 민간인의 피해는 희미해진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교과서 서술이 유지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2013년, 고교 한국사 교과서 검정 후 ‘민간인 학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보수 언론과 베트남 참전 전우회는 강력히 항의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표현에 대해 직권으로 수정을 요구하게 된다. 교학사를 제외한 모든 출판사의 집필자들은 정부의 수정 요구를 거부하지만, 이때 집필자와 출판사 사이 갈등이 생긴다. 출판사들이 집필자와의 상의도 없이 자체적으로 글을 수정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집필자들은 교육부와 집단 소송을 이어가게 된다. 이 과정을 거치며 교과서는 ‘학살’이라는 표현에 대해 직접적인 서술을 꺼리게 되었으며 내부의 검열을 거치게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미군의 ‘밀라이 학살 사건’의 경우 사진기자와 통역사까지 대동하여 계획적인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진행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은 끔찍한 학살이 일어난 손미마을 지역에 밀라이 박물관을 짓고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고자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권의 변화에 따라 과거에는 사과했다가도 이제 와서는 다시 책임을 부인하는 실정이다. 베트남에서 온 응우옌티탄과 응우옌 득 짜이는 지난 2020년 4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였다. 응우옌티탄은 1968년 2월 12일 오전 한국군 청룡부대 군인의 민간인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다. 이날 한국군은 퐁니 퐁넛 마을 주민들에게 “빵을 나눠줄테니 모여라”라고 했다. 74명의 민간인이 모였다. 그들 중 대부분은 부녀자와 어린이였다. 한국군은 이들을 줄 세워 총을 쏘았다. 응우옌티탄은 배에 총을 맞고 창자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상태로 기어다니다가 미군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녀는 가족 5명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인 학살 의혹 국가배상소송 8차 변론기일에서 “피해 사실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라며 책임을 전면 부인하였다. 그러나 2023년 2월 7일, 국가배상 소송 1심에서 응우옌티탄이 승소하였다. 재판부는 ‘피고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 사건으로 응우옌티탄의 부모와 언니, 남동생 등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오빠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는 명백한 불법행위에 해당한다”라고 판시했다. 응우옌티탄은 “학살 사건으로 희생된 영혼들이 저와 함께하며 응원해준 것이라 생각한다. 영혼들도 이제 안도할 수 있을 것이고, 위로가 될 것 같아 무척 기쁘다”라고 말했다. 응우옌티탄의 승소는 그녀가 진상규명을 요구한지 11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이번 판결은 개별적인 군인이 아닌 한국군 집단이 일으킨 민간인 학살을 법원이 인정한 첫 번째 사례가 되었다. 현재 국회에서는 2020년 4월에 발의된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이 여전히 계류 중이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책임 회피를 멈추고 역사를 직시하는 것이다. 베트남에 병원이나 학교를 지을 것이 아니라 위령비를 함께 짓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일이다. 교과서를 개정하고 역사를 제대로 교육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한 개인이 내리는 판단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짧은 기사 한 줄, 주변 사람의 말 몇 마디, 대중매체에 나오는 몇 분짜리 영상과 교과서 한 문단이 쌓이고 쌓이는 것이다. 그 작은 것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알고 있던 정보에 의문을 품을 때 비로소 커다란 폭력과 억압이 보일 것이다. 참고문헌 박중현. (2020). 한국 역사 교과서 속의 베트남 서술 분석. 역사교육 연구, 38, 395-438. 김현아, <전쟁의 기억, 기억의 전쟁>, 책갈피, 2002 김다연. (2022.08.13). "한국군 민간인 학살" 베트남인 증언…. 판결 영향 줄까, YTN, https://www.ytn.co.kr/_ln/0103_202208130533442829 정재호. (2022.10.07). [단독] '베트남인 학살 배상 소송 저지 방안' 은밀히 알아본 한국 정부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100515060004628?did=NA 김남기. (2022.10.08). 한국군 민간인 학살 숨기려는 정부... 과오를 지우려는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870594&CMPT_CD=P0010&utm_source=naver&utm_medium=newsearch&utm_campaign=naver_news 오효정. (2023.02.07).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정부가 배상해야"…첫 판결,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38925#home 정희상. (2023.03.01). 한국의 첫 인정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은 명백한 불법”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666 메인사진 _ 1971년 파월 한국군 맹호부대 환송식 현장 Ⓒ 경향신문사
제 4 호 혹시 분데스리가…아세요?
혹시 분데스리가…아세요? 202110483@sangmyung.kr 정기자 양현준 “손흥민이 혼자서 경기를 끝내러 달려갑니다. 손흥민! 대한민국이 2대0으로 앞서갑니다. 손흥민이 오프사이드였는지에 대한 VAR 판독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별 상관없습니다. 독일이 월드컵에서 탈락합니다. 톡 차넣으면서, 비록 대한민국은 16강 명단에 적히지 못하게 됐지만, 대신 역사책에 적히게 되었습니다. 독일을 조별리그에서 떨어뜨린 최초의 팀으로 말입니다.” -BBC 스포츠 해설가 조나단 마크 피어스(Jonathan Mark Pearce)- 카잔의 기적. 대한민국이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H조 조별리그 3차전에서 독일을 2대0으로 이긴 경기를 흔히 지칭하는 말이다. 이 경기승리 시 때에 따라서는 16강 진출이 가능했기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전 국민이 이 경기를 숨죽여 보았고, 결국 전 국민을 열광시키는 결과가 나왔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독일은 이 경기 패배로 첫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오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또한, 외국 베팅업체인 스포츠베팅다임닷컴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직후, 역대 월드컵 최대 이변 TOP 5를 소개하였는데 대한민국과 독일의 경기가 TOP 3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독일은 FIFA 월드컵 우승 횟수 2위,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횟수 1위를 차지하는 등 국제무대에서 굵직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독일은 축구를 빼놓고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축구에 진심인 나라이다. 그에 걸맞게 자국 리그인 분데스리가 역시 유럽 프로축구 5대 리그 중 하나에 들 만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와 명성을 지니고 있다. BUNDESLIGA 분데스리가 분데스리가는 독일의 최상위 프로축구 리그이다. 분데스리가라는 말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스포츠 리그를 일컫기 때문에 핸드볼, 야구, 배구, 농구, 하키, 럭비 등에도 분데스리가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분데스리가 하면 독일의 프로축구 리그를 많이 떠올린다. 분데스리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비교적 친숙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많은 선수가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다. 차범근, 손흥민, 차두리, 구자철 등 정말 많은 선수가 분데스리가를 경험했다. 우리나라의 선수들이 타 유럽 리그에 비해 독일 분데스리가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분데스리가의 특징에 있다. 우선, 분데스리가는 외국인 등록 규정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느슨하다. 분데스리가의 선수등록 규정은 독일에서 21세 이전 3년간 훈련 받은 선수가 최소 12명이 필요하다. 이를 홈그로운 제도라고 한다. 같은 홈그로운 제도를 두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는 잉글랜드 혹은 웨일스에서 21세 전에 3년간 훈련 받은 선수가 최소 8명이 필요하다. 여기까지 살펴보았을 때는 분데스리가가 규정이 더 빡빡하지 않냐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분데스리가 선수단 등록은 제한이 없는 반면,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는 선수단 등록 가능 선수가 최대 25명으로 차이가 있다. 그렇기에 타 리그 대비 다양한 선수를 영입하는데 거리낌이 덜하다. 나머지 하나는 우리나라 선수들이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좋은 활약을 하였다는 점이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 ‘바이어 04 레버쿠젠’을 UEFA컵 우승(현 UEFA 유로파리그)을 주축으로 이끈 차범근, ‘함부르크 SV’와 ‘바이어 레버쿠젠'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손흥민, ‘VfL 볼프스부르크'와 ‘FSV 마인츠 05’ 그리고 ‘FC 아우크스부르크'까지 선수 생활 대부분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뛴 구자철까지 많은 우리나라 축구선수의 좋은 활약으로 좋은 선례를 남김과 더불어 카잔의 기적 등 독일인들의 이목을 끌었다는 점이 이적시장마다 우리나라 축구선수들의 분데스리가 이적설이 계속되는 이유이다. 양날의 검, 분데스리가의 50+1 제도 아랍에미리트 국부 자본이 투입된 이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단일 시즌 역대 최다 승점 100점 우승에 빛나는 ‘맨체스터 시티FC’. 브라질의 네이마르(Neymar da Silva Santos Júnior), 프랑스의 킬리안 음바페(Kylian Sanmi Mbappe Lottin)를 각각 2,987억 원, 1,947억 원을 지불하여 데려와 역대 이적료 1위와 2위를 갈아치우며 어마어마한 카타르 자본을 과시한 ‘파리 생제르맹 FC’. 대부분의 축구 리그, 그중 최상위 수준의 축구 리그들은 구단주의 자본을 기반으로 팀을 이끌어나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시민구단 형태로 팀을 이끌어가는 경우도 존재한다. 시민구단이란 특정한 기업이나 개인이 소유하는 것이 아닌 연고지 기반으로 시민들을 통해 자금을 운용하여 구단을 운영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분데스리가에는 50+1이라는 다른 리그에는 없는 제도가 존재한다. 50+1 제도란 비상업적 비영리 단체가 51% 이상의 구단 지분을 보유해야 하는 제도이다. 쉽게 말하자면 구단 자체나 구단 팬들이 구단 지분의 51% 이상을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1963년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에 기업 출자로 설립된 ‘바이어 04 레버쿠젠’과 ‘VfL 볼프스부르크’ 그리고 20년간 꾸준히 특정 자본의 지원을 받은 ‘TSG 1899 호펜하임’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민구단의 형태를 띠고 있다. 구단 자체나 구단 팬들이 구단 지분의 51%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선 근본적으로 자국 리그가 상업적인 측면보다는 자국 축구 팬들을 위한 축구로 유지하려는 정책이다. 개인이든 법인이든 최대 소유할 수 있는 지분이 50%가 되지 않기에 시민들이 구단주가 구단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렇기에 비리가 적고 재정이 비교적 투명하고 건전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꼽을 수 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특정 거대 자본의 손길을 거부하고 다양한 스폰서 유치를 통해 구단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또한 주요 선수를 비싼 값으로 처분함과 동시에 그 빈자리를 대체할 선수 영입에 큰돈을 쏟아붓지 않고 스카우트 시스템으로 싼값에 데려오는 좋은 영입을 여럿 성사하는 기조를 띄고 있다. 가장 중요한 성적까지 뒷받침되며 구단의 명성이 유지되고 있다. 부채보다 순이익이 훨씬 많은 흑자 경영을 지속하는 중이라, 유럽 전체를 놓고 봐도 올바른 구단 운영모델로 손꼽힌다. 축구를 금전적인 이득만을 얻으려는 수단으로 삼지 않기에 구단 자체가 축구와 그 팬들로 이루어진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러한 점이 무수한 자본이 투입되는 다른 리그와 다르게 돈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자부심마저 엿볼 수 있어서 정말 매력적인 리그라는 생각이 많이 드는 부분이다. 그러나 장점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면 단점 역시 눈에 띄게 존재한다. 바로 리그의 수준 하락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12/13 시즌부터 21/22 시즌까지 무려 10년 연속으로 ‘FC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 우승을 차지했을 만큼 압도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상 ‘FC 바이에른 뮌헨’을 견제할 수 있는 팀은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상위권 순위 역시 굳어지어 가고 있다. ‘FC 바이에른 뮌헨’은 곧 리그 우승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지면서 리그 우승을 원하는 좋은 선수들은 ‘FC 바이에른 뮌헨’ 외의 다른 분데스리가 팀의 이적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유망주, 라이벌 팀의 주축 선수 등이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가거나 다른 리그로 가는 모습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구단들이 재정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점도 한몫한다. 이러한 상황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기존에 좋은 활약을 하던 선수의 대체자를 제대로 구하지 못하면 성적 하락은 자연스레 따라오는데, 성적이 좋지 않은 팀에 많은 스폰서를 유치하긴 힘들다. 점점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쩌면 당연하게도 독일 구단들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제외하고는 좋은 성적을 거의 거두지 못한다. 이를 해결할 방안은 앞서 언급한 ‘맨체스터 시티 FC’, ‘파리 생제르맹 FC’와 같이 해외의 거대 자본이 들어와 과감한 투자로 팀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 최선이다. 현시점에서는 과거와 달리 점점 자본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자본, 즉, 돈이 몰리는 곳에 선수들이 몰리고, 선수들이 몰리는 곳에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리그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이다.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중위권의 팀도 타 유럽 5대 리그의 주요 클럽만큼이나 돈을 지출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제는 어쩌면 단순히 구단이 키워내는 유망주에만 팀의 명운을 걸기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아닐까? 그렇다면 50+1 제도는 폐지돼야 할까? 50+1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은 대부분 글로벌 팬인 경우가 많다. 현지 팬들은 찬성하는 입장이 강하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할까. 분데스리가는 50+1 제도 덕분에 시민들이 직접 나서서 경기장 입장티켓 가격 방어가 잘 되어가고 있다. 많은 자본이 몰리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와 비교하면 정말 큰 가격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에서 TV로 보는 글로벌 팬과 의견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분데스리가의 평균 관중 수는 4만 5천 명으로 전 세계 스포츠를 다 합치더라도 NFL에 이어 2번째 높은 수치이다. 하부 리그 경기도 많은 관중 동원력을 보이는 것은 돈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거대 자본의 투입이 항상 성공의 길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탈리아의 ‘파르마 칼초 1913’의 경우 지 잠피에트로 마넨티에게 구단을 판매하였는데 알고 보니 돈세탁과 횡령을 목적을 인수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로 인해 4부 리그로 강등당한 사례도 있다. 또한,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여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구단 상품 및 티켓, 이적과 재계약 금지 조치가 취해지면서 어려움에 빠진 사례도 있다. 이외에도 재판매를 목적으로 구단을 인수하고 구단을 어려움에 빠지게 만든 사례 역시 꽤 존재한다. 구단과 선수 그리고 팬 구단과 선수 그리고 팬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팬이 없다면 스포츠 경기는 그저 공놀이에 불가하다. 이는 아무런 경제적 가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만큼 스포츠에 있어 팬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50+1 제도만큼 팬들에게 힘을 실어 줄 만한 제도는 없다. 독일은 상위리그, 하위 리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저 내가 태어난 곳, 아니면 의미가 있었던 축구팀을 응원하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축구로 연대감을 느끼며, 축구를 가장 재밌게 즐기는 민족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50+1 제도는 수년이 지나도 독일 분데스리가만이 가진 특별한 제도로 남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수한 자본이 쏟아지는 현재 흐름과는 반대로 가는 제도이기 때문에 굳이 새롭게 채택 할 이유는 없다. 흐름에 맞지 않는 제도이기에 독일 분데스리가 발전에 있어 큰 장애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는 구단과 팬 사이 단단한 연대감을 가진 독일 분데스리가의 팬들은 자본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어쩌면 앞서 언급한 50+1 제도의 단점을 보완하여 결속된다면 수십년이 지난 후엔 독일 분데스리가가 각광받을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 <참고문헌> 김현민(2022), 분데스리가에만 있는 규정 50+1, 의미와 미래, 스포츠LAB, 2022. 03. 25., https://contents.premium.naver.com/sclass/slab/contents/220325230032094Lf PREPO football, [한글자막] 한국 vs 독일 레전드 경기! BBC 영국 현지 해설 반응, 2018. 09. 20., https://www.youtube.com/watch?v=yDkat1AEaec 메인사진 _ 분데스리가 로고 _ https://www.bundesliga.com/de/bundesliga
제 4 호 범죄자들의 무기: 심신미약(心神微弱)
범죄자들의 무기: 심신미약(心神微弱) 202210316@sangmyung.kr 정기자 정지은 심신미약(心神微弱), 사전에 따르면 마음이나 정신 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 시대가 지날수록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였다. 그러나 세계 곳곳에서 점점 더 악랄한 수법으로 범죄가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대를 불문하고 변하지 않는다. 그동안의 우리나라 범죄 사건들만 생각해 보더라도 아무런 이유를 막론하고 벌어지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았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는 이러한 범죄가 분명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범죄에 대한 처벌이다. 일명 솜방망이 처벌이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범죄 처벌.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SNS 속 사람들의 대화만 봐도 우리나라의 처벌에 대한, 특히나 심신장애라는 범죄자들의 히든카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부정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뉴스에서 볼 수 있는 몇몇 사례들은 우리들의 분노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러한 논란의 중심에 있는 심신장애는 심신상실과 심신미약으로 나뉜다.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사라져 의사를 결정할 능력을 잃었다면 심신상실, 이것이 미약한 상태면 심신미약이라고 볼 수 있다. 관련하여 실제 법 조항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제10조 제1항에서의 ‘사물’이란 일과 물건을 의미하고, 이러한 사물을 ‘변별한다’는 것은 구분하고 판단한다는 의미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사회적 인식에 따른 사건에 대한 판단능력이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심신미약 판단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정신적 장애가 있는 사람이라도 범행 당시의 정상적인 판단 능력과 통제 능력이 있었다면 심신장애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것을 생각해 보았을 때 심신미약의 인정 여부가 형을 감면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심신장애가 없는 범죄자가 처벌을 아예 받지 않는 심신상실을 주장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심신미약이라고 우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때 범죄자의 심신미약 인정 여부는 의사의 의학적인 판단이 아니라 판사의 재량에 의해 결정된다. 피고인이 범죄 당시 판단력과 의사 결정 능력이 얼마나 흐렸는지를 결과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은 의사가 아니라 판사라는 것이다. 심신미약의 가장 큰 문제, 주취 감형 문제는 너무나 당연시하게 범죄자들이 심신미약을 주장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법원에서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범죄자들이 심신미약을 무기로 가장 많이 악용하는 주장은 가해자가 음주 만취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과 가해자가 평소에도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어서 일상생활도 힘들었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심신미약에 대한 법원의 판결이 국민의 사회적인 분노를 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심신미약이라는 이유로 범죄자들의 형벌을 감형해 준다는 이유만 아니라 음주 후 범죄를 일으킨 범죄자한테까지 법원의 판결이 관대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음주 후 저지른 범죄가 심신미약으로 감형 가능하다는 것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는 선천적 장애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심신장애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만취를 이유로 범행 당시 심신미약이었다고 주장하는 범죄자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 마신 경우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형법 제3항에 따라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심신미약 감형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하여” 음주를 통해 범죄를 저지를 것에는 분명 정당한 형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술을 많이 마시면 정신이 불분명해져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스스로 술을 마시고는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는 사실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억지이다. 심신미약에 대한 다른 나라의 태도 그렇다면 해외는 주취 감형을 포함한 심신장애에 대해 어떠한 입장일까. 프랑스는 음주로 인한 폭행, 성범죄에 대해서는 형을 감경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중 처벌 규정을 두고 있다. 영국도 만취 범죄에는 가중 처벌을 선고한다. 특히, 뉴스를 통해 미국 범죄자들의 징역이 몇백 년씩 내려진 사건들을 보고는 ‘우리나라도 저렇게 해야 하는데...’라며 한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은 영미법을 기반에 두며, ‘법원의 판례가 곧 법’인 실제 판례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따라서 과거에 내린 판결들이 법과 같은 구속력을 지니며 비슷한 사건이 판결의 예시가 되어 영향을 준다. 범죄자에게 적용되는 모든 죄를 더해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못 할 100년, 200년 혹은 1000년도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2016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프레즈노 고등법원은 4년간 친딸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르네 로페즈씨에게 징역 1천 503년을 선고한 사례가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원칙으로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천부인권'이 원칙이면 범죄자를 교화하는 데에 초점을 둔다. 우리나라는 법전에 쓰여 있는 법에 근거하여 판결하기 때문에 미국의 사례보다는 비교적 해석의 여지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가장 무거운 죄의 형량을 기반1으로 다른 죄들을 가중해서 형량을 결정짓기에 낮은 형량이 나오게 된다. 우리나라의 사법 체계가 애초에 강력한 처벌로 인한 보복의 의미가 아니라 교화를 통한 재범 방지 및 범죄 예방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것은 인권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범죄를 막을 수 있을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여러 논란에도 심신미약의 감형 폐지가 어려운 이유일 것이다. 예를 들어 조현병과 같은 정신질환자는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범죄에 해당한다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상태에서 우발적 범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해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심신미약자가 될 수 있겠다 조두순은 지난해에 출소해 피해자가 사는 경기 안산으로 돌아갈 것이 알려지며 크게 논란이 되었다. 이 사건은 상해치사, 아동 성범죄, 성폭행 등의 중범죄 전과 18범인 조두순이 끔찍한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심신미약으로 고작 징역 12년형만 선고받아 많은 국민의 분노를 유발한 심신미약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재판에서 법원은 “조두순은 알코올 의존증 환자였으며,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질러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이유로 감형해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들은 시대가 변해도, 사회 인식이 변해도 끊임없이 일어난다. 2016년 ‘강남역 묻지 마 살인사건’에서도 피의자가 조현병으로 인해 심신이 미약한 상태였다며 감형해 주었고, 2018년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에서는 피의자가 감형을 노리고 우울증 진단서를 법원에 제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분노를 일었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심신미약을 악용하여 자신이 받아야 마땅한 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나쁜 선택권이 주어진다. 실제 어느 형벌 체계를 선택할지는 그 나라의 법체계 및 사회적인 요소 등을 다 고려해서 선택해야 한다. 이를 잘 고려하여 소외되거나 억울한 누명을 쓰는 사람들이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법체계를 확실히 하고 죄에 마땅한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정직한 세상이 찾아오기 위해선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 범죄자를 법에 따라 판결하여 마땅한 벌을 받게 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국가는 범죄자를 예방하고 범죄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범죄자가 일반인인지, 심신미약자인지, 심신상실자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범죄’ 자체로부터 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 대한민국 법체계에 대해 심신미약에 대한 형법을 아예 폐지하기보다는 판사의 판단과 재량에 따라 감형이 가능한 ‘심신미약 상태’를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심신미약에 해당하는 모든 사례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정하고 판단하기는 어렵겠지만, 법원의 일관된 판단이 가능하도록, 그 판단에 대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심신미약’에 대한 감형 기준을 명확히 하여 계속해 만들어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에 따른 마땅한 벌을 받고,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는 그러한 세상이 오길 간절히 바라며 글을 마친다. 1) 만약 가중이 필요하다면 형법에서 명시된 경우에만 가중 처벌이 가능하기에 살인을 비롯한 다른 범죄를 행했다면 이는 모두 살인죄로 흡수되어 살인죄의 형량만 받게 된다. 조두순이 받은 ‘심신미약’ 감형,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KBS NEWS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5477393&ref=A> 심신미약 감형 의무조항은 폐지돼야, 경북도민일보 <http://www.h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71706> 국가법령정보센터_형법 제10조 <https://www.law.go.kr/%EB%B2%95%EB%A0%B9/%ED%98%95%EB%B2%9 메인사진 _ https://pixabay.com/photos/hammer-libra-dish-justice-law-802296/
제 4 호 걸어서 애니속으로
걸어서 애니속으로 202110353@sangmyung.kr 정기자 송지민 여러분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시나요? 저는 굉장히 좋아하는데요! 제 여가의 대부분을 애니메이션을 보는 데에 쏟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에 진심이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데요. 지브리스튜디오의 몽글몽글한 감성은 세대를 막론하고 영화를 보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의 실사와 같지만, 회화 작품들을 보는 듯한 그림체들은 마치 주인공들이 실제로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처럼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아 영화마다 큰 기대와 사랑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에서만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전 세계적인 인기를 따지고 보았을 땐, 미국의 월트 디즈니와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기 때문이죠.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영화가 아닌 TV에서 방영하는 애니메이션 덕분인데요. 순정물부터 학원물, 판타지 그리고 SF 등 다양한 장르를 불문하고 애니메이션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특히 이세계를 다루는 액션 장르 애니메이션들을 볼 때면, 애니메이션 분야로는 일본을 따라올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다 문득 “어떻게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 되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대 기술이 부족한 것도, 타겟층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래서 이번 기사에서는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서양 애니메이션의 제작 기법과 차별화된 스타일을 내보였습니다. 과거, 미국의 월트 디즈니의 경우,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때 1초에 24장의 그림을 넣어 만드는 '풀 프레임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그러한 기법에서 제작하는 데에 들어가는 비용과 시간을 줄이기 위해 '리미티드 기법'을 창안하여 사용하게 되는데요. 이는 1초에 10장 이하의 그림을 이어 붙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기법으로, 기존에 사용했던 장면을 재사용 함으로써 제작비 절감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매회 변신하거나 하늘을 날아가는 장면을 배경만 바꾸는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제작 시간과 제작비 절감에 큰 도움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25분간 방영되는 애니메이션을 주 1회마다 방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첫 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산업구조를 들여다보면 일본이 애니메이션으로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철저한 '타겟 마케팅'으로 상품에 가장 적합한 판매 소비자층을 설정하여, 제품 자체에 차별화를 두어 경쟁력을 갖추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층에 인기가 있는 애니메이션의 경우, 실생활에서도 쓸 수 있는 다양한 굿즈를 만들어 소비를 끌어내는 것처럼 말이죠. 이러한 마케팅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하나의 산업으로 존재하게 되어, 기획에서 마케팅까지 수만 명의 인력들을 보유하게 되었는데요. 그렇기에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굿즈에 관련한 많은 콘텐츠와 홍보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일본은 애니메이션 시장 자체의 규모도 크고, 또 그 안에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에 일반 애니메이션 회사들과의 경쟁력에서 월등히 앞서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이 애니메이션 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에 기술적인 측면과 산업구조만을 이유로 들 순 없습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다른 애니메이션들과 달리 '이야기'를 중시했습니다. 이는, 앞서 말했던 일본의 특수한 '리미티드 기법'의 사용과 관련이 있는데요.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국의 애니메이션과 달리, 1초당 들어가는 그림의 수가 현저히 적었습니다. 캐릭터 간의 대화 시, 캐릭터들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입만 움직이거나, 액션 장면에서는 캐릭터들은 가만히 있고 배경의 강조선만 움직이는 등의 연출을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캐릭터들의 움직임이 둔탁했으며, 매회 동일한 패턴의 반복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패턴화에 차별화를 두고자, 작품 속 '이야기'에 집중하여 애니메이션 안에서 다양하고 풍부한 장르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번 기사를 작성하면서 왜 우리나라의 애니메이션 산업은 일본만큼 커지지 못했는 지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우리나라 애니메이션의 타겟층은 주로 어린아이들에 머물러 있고, 애니메이션을 방송하는 채널도 극히 적으며, 주로 재방송만이 이루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질적으로 소비하는 계층은 어린애들이 아닌 성인들일 텐데 말이죠. 따라서 애니메이션의 타겟층을 보다 넓히고, 방영 채널의 가짓수를 늘려 '타겟 마켓팅'을 실시한다면 우리나라도 애니메이션 강국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메인사진 _ 넷플릭스 화면 캡처
제 4 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로 다른 개혁-개방(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의 결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서로 다른 개혁-개방(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정책의 결과 정기자 201710846@sangmyung.kr 임 지 혁 “페레스트로이카는 민주주의적 방법에 의해, 인민에 의해, 인민을 위해 실현되는 완전한 혁명적 과정이다.” 1990년에 출간된 자하 교지 23호에서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개혁)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이는 당시 소련의 개혁, 개방 정책에 대해서 다룬 것이었다. 아직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 소련의 마지막 서기장이자 대통령이었던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개혁하며 그 체질을 개선하는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다. 기사는 그 말미에 ‘페레스트로이카의 결론은 고르바초프의 실천의 결과에 있을 것’이라며 마무리를 지었는데 과연 실천의 결과에 따른 것일까, 아니면 저자가 예상하지 못했을 결과인 것일까, 그리고서 몇 년 뒤에 소련은 완전히 분해되었다.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연방은 이제 러시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 십 수개의 나라로 쪼개졌다. [그림 1 : 세계지도] 러시아는 유럽에 속할까, 아니면 아시아1에 속할까? 아마 다들 먼 옛날 언젯적에는 세계지도 위에 광활하게 펼쳐진 러시아의 지도를 보고는 이런 의문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해보자. 러시아는 유럽일까 아니면 아시아일까? 일반적으로는 러시아 서쪽에 위치한 우랄산맥을 경계로 하여서 그 왼쪽은 유럽, 그 오른쪽은 아시아로 구분한다는 지리학적인 답변을 듣고는 흡족하게 간식을 먹으러 떠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답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어린 아이가 심사숙고 끝에 던졌을 저 의문은 소련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매우 좋은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러시아는, 혹은 소련은, 그리고 그 구성국들은 유럽 문화에 속하였을까 아니면 아시아 문화에 속하였을까? 그 중요한 논제에 대해서 살펴보기 위해서 그 곳의 사람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먼 옛날 지금의 우크라이나 부근에 살던 사람들은 키예프(현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중심으로 국가를 만들고, 주변 세력들, 특히 동로마와 많은 접점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당초 로마에게 ‘비스와강의 웨네티 종족(Vistula Veneti)’이라고 불리면서 이민족 취급을 받았지만 점차 세력을 키우면서 동로마제국과 사돈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이 때의 인연은 지금까지 이어져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정교회(동방교회)를 믿고, 동로마의 문양에서 차용한 쌍두 독수리 문장은 오늘날 러시아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동로마, 즉 동방의 기독교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이들은 동방(Oriental)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13세기에는 모스크바로 중심지를 옮긴다.2 이렇게 건설된 나라를 모스크바 공국이라고 부르는데, 이 도시는 머지않아 동로마의 뒤를 이은 동방 세계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련의 중심을 이루는 도시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두 곳이었다. 모스크바는 소비에트 연방의 중심지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옛날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모스크바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원래 동방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건설한 도시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다소 다른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는 곧 그들의 서구성을 대표하는 곳이다. 1682년 러시아의 황제인 차르에 즉위한 표트르 1세는 러시아의 근대화, 서구화를 제창하면서 통치 체계를 개편하고, 문자와 생활 양식, 그리고 심지어는 수염 길이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1708년에는 마찬가지로 차르가 주도하여서 원래 늪지대였던 곳에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새로운 도시인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서구화의 상징적인 도시임과 동시에 러시아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기를 원했다. 마침내 1713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완전히 수도를 옮기었고, 러시아는 이제 당당히 서구의 일원이 되었다. 다시 한번 처음에 던졌던 질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자. 러시아는 유럽일까, 아니면 아시아일까? 러시아는 처음에는 동방으로서의 정체성, 즉 아시아의 정체성을 가지고 국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점차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서방으로서의 정체성을 필요로 했고, 결국 유럽의 정체성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근대화는 완벽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령 프랑스가 1318년에 실시한 농노해방령은 러시아에서는 1861년에야 발표되며 550여년이나 늦게야 농노제를 폐지한다. 차르는 유럽의 일원이 되고자 하였지만 그 구성원들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불문하고 자신의 고유적인 정체성과 혼란을 겪었다.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이러한 혼란을 봉합한 시도로서 평가할 수 있다. 공산주의의 초기 이념 가운데 하나인 인터내셔널(국제주의)은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 국제적인 연대를 강조하면서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했다. 다시말해 동방도 서방도 아닌 새로운 그들만의 가치관을 선보인 것이다. 그리고 1941년에 2차세계대전, 혹은 대조국전쟁을 겪으면서 마침내 동구권이라는 정체성을 정립했다. 그러나 동구권의 정체성은 영원할 수 없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 등 그들과 대척점에 선 서구권과 매우 큰 갈등을 빚기도 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소련의 정책적 실패는 동구권 그 자체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다. 페레스트로이카는 결론적으로 이러한 한계점들을 해소하고 동시에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규정하기 위한 시도였다. 고르바초프는 개혁 과정을 통해서 소련에 서구권의 기본 이념들-가령 정보의 공개성, 시장경제의 도입, 민주화 등-을 소련에 보급하려 했으며 이는 서방과 동방, 서구와 동구의 흑백 논리에서 벗어나 그 중용을 찾고자 하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그림 2 : 소련 지도 (Ssolbergj, CC BY-SA 3.0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3.0>, via Wikimedia Commons)]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결국 실패했고 이제는 소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서구와 동구의 구분은 이제 사라졌고, 대신 서방과 동방의 대립 구도가 다시 세상에 펼쳐졌다. 그리고 옛 소련을 구성하는 두 개의 주요한 축이었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그 대립구도에 위치한다. 먼저 우크라이나는 서방의 길을 선택했다. 우크라이나는 2013년 유로마이단 혁명이후 NATO나 EU 등 서방과 경제적, 군사적, 정치적 협력을 강화해 나갔다. 반면 러시아는 동방의 국가가 되었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친 서방 정책이 러시아의 이익에 반대된다고 판단하여서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의 영토인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이후로도 우크라이나의 내전에 간섭하고, 2022년 2월부터는 특수군사작전을 선포하며 우크라이나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했다. 지금으로서는 그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지를 예측하기는 힘들지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나라는 아마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국경을 맞대고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 국경선을 경계로 서로 다른 모습의 풍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쪽은 군사 부분을 필두로 하여서 전후 복구 과정에서 수많은 서방의 제도와 문화들이 유입될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는 어쩌면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근대화와 서구화의 상징적인 도시가 될지도 모르겠다. 반면 러시아는 사뭇 다른 풍경이 보일 것이다. 러시아의 대통령궁인 크렘린의 성벽이 더더욱 두터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두 나라의 결정 또한 일종의 페레스트로이카일 것이다. 소련이라는 타협점으로부터 벗어나서 우크라이나는 서방으로서, 러시아는 동방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정한다. 러시아제국과 소련을 거치며 오랜 세월동안 내재하던 갈등을 이렇게 상반된 두 나라로서 분리한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1990년의 자하 교지 기사의 말미와 같이 그들의 실천의 결과를 기다린다. 33년 전의 사람들과 지금의 우리는 아마도 비슷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것이 부디 작년에 타계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처럼 실패하지 않기를, 소련의 혁명가였던 트로츠키의 말 따라 그 땅의 사람들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가기를, 그런 시대가 오기를 기원할 뿐이다. 1 근동(Orient)으로서의 아시아 2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가 점령된 것이 그 원인이다. [참고자료] 김광동.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사회주의의 개혁". 상명대학교자하교지편집위원회 자하 23호 (1990): 40-52. 메인사진 _ 작가@wirestock https://www.freepik.com/free-photo/illustration-flags-ukraine-russia-separated-by-crack-conflict-comparison_29132493.htm#query=Russia%20Ukraine&position=4&from_view=search&track=ais
제 4 호 대만은 일본에게 친구(親舊)인가, 을(乙)인가
대만은 일본에게 친구(親舊)인가, 을(乙)인가 202210058@sangmyung.kr 정기자 이소명 평소 “꼭 가보고 싶은 나라가 어딘가요?” 하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냉큼 “대만이요.”라고 대답한다. 대만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재밌게 본 로맨스 영화들이 대만 영화였기 때문이다. 영화 ‘청설’ 속 거리에서 먹지만 든든해 보이는 고기 도시락이라던가,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 볼 수 있는 따스하고 포근해 보이는 길거리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그저 그런 소망이다. 나의 이런 단순한 대만 사랑을 알게 된 어머니가 하루는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너 대만 역사는 제대로 알고 있니?” 이 질문 하나가 나의 뇌를 관통했고, 검색창에 ‘대만 역사’를 검색하게 했다. 대만과 중국에 대한 사실은 평소에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의 시선을 끈 건 대만이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내용이었다. 놀라운 사실에 검색창에 ‘대만 일본’을 자연스럽게 검색하였고, 현재에는 두 국가가 꽤 우호적인 듯한 헤드라인이 집중을 불러일으켰다. - 일본-대만 반도체 동맹 본격화‥투자금도 '반반' - MBC 뉴스, 곽승규 기자.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가 22년 6월 일본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서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하였다. 연구개발센터의 투자금 역시 대만과 일본 두 국가가 반씩 부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일본의 반도체 수요가 60% 이상을 차지한다는 점과 대만의 TSMC가 일본의 우수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두 국가의 협력은 매우 매력적인 계약이다. 위 뉴스만 보아도 대만과 일본은 아주 친밀한 관계를 지닌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만은 1895년부터 1945까지 50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다. 과거의 대한민국 역시 35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스포츠 경기의 한일전만 해도 모두가 손을 모아 승리를 기도한다. 그런데 대만과 한국은 똑같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으나, 명확히 다른 태도를 보인다. 의문을 유발하는 차이가 필자를 글 쓰게 만들었다. 어쩌다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까? 현재 일본의 부속 섬인 오키나와는 1800년대 당시 ‘일본’과 분리된 ‘류큐’ 왕국이었다. 1871년 류큐 왕국 주민들은 태풍에 피항하고자 대만에 발을 들였다가 대만 원주민에 의해 류큐인 54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대만을 첫 번째 식민지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에 방법을 고안해 냈다. 우선 류큐를 먼저 침략하고, 대만 원주민에 의해 살해된 54명의 주민 역시 일본의 자국민이라 주장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를 시행했고 ‘자국민 살해’라는 명분으로 대만까지 손에 넣게 되었다. 이로써 1895년 대만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일본이 대만을 통치했던 방식은 대한제국 침략 당시의 방식과 명확한 차이가 드러난다. 일본은 대만을 침략하고 2년 동안 자유롭게 대만을 떠날 수 있도록 유예기간을 주었다. 대만은 이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이것이 싫다면 중국이나 다른 땅으로 떠날 기회를 제공한 것이었다. 식민 통치라는 이름에 비해 확실히 구속이 적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통치 방식뿐만 아니라 침략 당시 대만과 대한제국의 상황에도 차이가 존재했다. 대만은 왕이나 황제와 같은 통치자 개념이 부재했다.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왕조가 멸망했다는 원한이 있었으나 대만은 이러한 원한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인지 대만이 일본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은 대한제국 국민들의 행했던 독립운동에 비해 확연하게 미비했다. 일본의 대만 침략 과정과 그 당시 상황만 보아도 대만의 현 태도는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 결정적으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중국에서는 내전이 발생하였는 이는 현 대만에 방대한 영향을 미친다. 중국 내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두 당이 집권을 위해 내전을 벌이는데 이에 패전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대만으로 이전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당은 대만에서 정부를 재건하기 위해 기존 대만에 거주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극단적인 독재와 공포적인 통치로 국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고, 이는 ‘대만 백색테러’로 이어진다. 대만에서는 약 30년간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민간인 약 2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연속해서 두 개의 외부 집단의 지배를 받은 대만인들은 상대적 비교를 하게 된다. “차라리 일본 통치 시절이 나았어.”라며 말이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의 국민당 모두 악의를 가지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자원을 약탈하고 타국에 아픔을 안겨준 것은 똑같다. 대만은 일본에 의해 발전이 되었지만, 이는 일본이 다른 나라로 쉽게 진출하고자 하는 경로이자 수탈의 수단이었다. 앞서 제시한 일본이 대만에 준 2년의 유예기간도 역시 일본의 입장에서는 무력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에 불과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비통한 사실 중 하나인 위안부와 관련된 피해자에는 대만 여성들이 있다. 그리고 대만 남성 역시 대한제국 남성과 같이 강제징집의 대상이었다. 한 나라의 정체성을 통제하는 황국신민화 정책 또한 대만에서 시행되었다. 대만어, 원주민 언어 사용을 통제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였고 신사참배 역시 강요의 항목이었다. 일본에 대한 투쟁이 대한제국에 비해 적었던 것이지 대만이라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1915년 민간 신앙 종교인 ‘시라이안’을 신봉하는 1,200여 명의 한족이 일본을 대상으로 투쟁한 시라이안 사건이 있다. 본 사건은 일본군에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약 한 달간 대치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항복한 자는 물론이고 사건과 무관한 마을 주민들까지 학살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확한 수치 자료는 없으나, 아직도 대치 장소였던 타파니에는 수많은 유골이 발굴된다는 점에서 그 가혹함은 말로 이룰 수 없다. 1930년에는 일본 경관이 원주민 족장을 무시하며 발발한 우서 사건이 있었다. 일본 족장에게 원주민 족장이 포도주를 권유했고, 경관이 더럽다며 족장을 구타함으로 사건은 시작되었다. 원주민들은 일본인 100여 명을 살해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정부는 원주민 마을에 독가스를 살포하여 원주민 600여 명이 사망했다. 그 후에도 일본 정부는 원주민 200여 명을 집단 학살했다. 즉, 대한민국과 대만은 일본으로부터 같은 고통을 겪은 것이다. 한 대만인은 말했다. “일본에 통치를 받았던 시절, 대만은 국가로서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무력 통치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어요.” 수많은 대만인 중 한 명의 발언일지 모르지만,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대다수의 대만인은 이와 같은 생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일본대만교류협회(日本台灣交流協會)가 22년 1월에 대만인 20~80세 남녀 1,068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1년 대만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 조사 결과 대만인들이 좋아하는 국가 1위로 일본(약 60%)이 차지했다. <사진1. 2021년 대만인의 일본에 대한 감정> 대한민국의 국민인 필자로서는 대만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가 몹시 어렵다. 일제강점기 시절 경복궁의 근정전의 시야를 가로막았던 조선 총독부는 해방 이후 1995년에 철거되었다. 해방 이후 철거까지 50년가량이 걸린 것인데 이마저도 왜 이렇게까지 시간이 걸린 것인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대만총독부 건물은 여전히 대만 총통부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한 대만인은 말했다. “저는 일본을 싫어하지 않아요. 사이좋게 지내고 싶어요. 세계 평화는 제일 중요하잖아요.” 대만의 일본 사랑은 국민들 개개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공조 과시까지 이어진다. 실제 22년 3월 대만 총통인 차이잉원과 당시 일본의 총리 아베는 공개적으로 화상회의를 진행하며 두 국가의 협력을 이야기했다. 이 회의에서 차이 총통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자신의 일처럼 여긴다며 대만과 일본이 교류 협력을 강화해 역내의 평화 안정을 촉진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더불어 일방적 무력에 의한 주권 변경은 용납할 수 없다며 평화 안정의 중요성을 강조해준 일본에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다. 대만의 국민도, 대표도 ‘평화’를 언급하며 일본을 옹호했다. 현재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은 절정에 다다랐다. 22년 10월에 시행된 중국 20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은 평화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무력 사용을 포기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고 말했다. 시진핑의 발언대로 중국은 대만 침공을 위한 해안 무기 개발에 집념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을 내세운 중국의 봉쇄 정책은 대만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오기에 다른 강대국인 일본을 지지하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었을 것이다. 이 해결책에는 단순 일본만이 아니라 미국도 연결되어 있다. 타이완 전쟁 발발 시, 미국의 원조를 받는다면 대만과 가까운 땅인 일본의 지원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일본에는 미국의 함대도 주둔하고 있고, 미함대 출발 동시에 일본의 자위대도 함께 공조할 가능성까지 있다. 하지만 현재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역사를 잊은 듯한 태도를 보이는 대만이 과연 당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일개 대학생인 필자가 ‘이런 방법도 있었는데.’라며 어쭙잖게 발언할 사소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일개 대학생인 나도 아는 것이 있다. 비겁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말의 근원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전 세계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박혀있다. 출처도 불분명한 말임에도 많은 세계인들이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의 의미가 있고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만인들은 이 명언을 놓친 채 살아가고 있다 <참고 문헌> 김소연,“대만 전쟁 대비”…일본, 육·해·공 자위대 통합사령부 신설 추진,한겨레,2022.10.30.,<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064894.html> “대만 사람들이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 유튜브 비디오, 6:12, 게시자 “딩글 dinggle”, 2019. 8. 16.,<https://www.youtube.com/watch?v=QNvICAAbdrc> 2021년대만인의일본에대한감정,일본대만교류협회(日本台灣交流協會),<https://www.koryu.or.jp/tw/> 연합뉴스,대만 차이잉원, 日 '막후실세' 아베와 화상대화…대중 공조 과시,2022.03.23.,<https://www.yna.co.kr/view/AKR20220323096400009> 이영희,“대만 침공 등 대비”…일본, 미군과 소통할 통합사령부 만든다,중앙일보,2022.10.31.,<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13464#home> 이장훈,TSMC 앞세운 대만의 질주, 올해 1인당 GDP 韓日 앞선다,주간동아,2022.10.31.,2022.10.31.,<https://weekly.donga.com/3/all/11/3729691/1> 현영준,바이든 "대만 침공 시 군사개입"‥일본 힘 키워 중국 대응,mbc 뉴스,2022.05.23.,<https://imnews.imbc.com/replay/2022/nwdesk/article/6371438_35744.html> 2021년대만인의일본에대한감정,일본대만교류협회(日本台灣交流協會),<https://www.koryu.or.jp/tw/> 메인사진 _ 蔡英文 Tsai Ing-wen,대만 총통 차이잉원 트위터,2022.03.22.,일본 총리 아베와 화상 대화를 나누는 대만 총통 차잉원의 모습,<https://twitter.com/iingwen/status/1506462361590194183?cxt=HHwWjoCjoanig-gpAA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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